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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예배 (박창훈 목사)설교말씀 요약 박경옥 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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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악에서 구하소서”

(요한복음 17장 12절-19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후반부에 해당합니다. 앞부분은 제자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한 것으로 생각해 보았다면, 12-19절까지의 후반부는 예수님의 청원이 들어가 있는 기도입니다. 

 

공관복음에서도 마지막 식사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를 위해 기도했는데, 그 때는 독특하게 베드로를 위한 기도로,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바로 그 기도처럼, 실제로 베드로를 위한 기도는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베드로를 향한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 모두를 위해 기도를 하셨는데,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란 암시를 강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3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자신의 기쁨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13절의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간구하신 기쁨은 예수님 자신의 기쁨이며, 그 기쁨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누렸던 기쁨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함께 나누고자 한 기쁨은 바로 한 분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신, 즉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아는 기쁨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과 의지에 순종할 때 얻게 되는 기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얻게 된 기쁨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누리게 된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전혀 기쁘지 않은 상황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14절의 말씀처럼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상황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미움과 배척과 박해를 받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간구하는 기쁨은,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평가하자면, 도저히 말도 안되는 기쁨의 이야기입니다. 한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이야기,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오셔서 자신의 성품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세상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관심을 갖지도 않는 그 기쁨을 제자들에게 주시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희망이 되는 것은 14절 상반절에 쓰인 두 개의 동사에서 나타납니다. 먼저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라는 문장에서 “주었사오매”라는 동사는 완료형(perfect)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는 일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해오고 있으며,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에서 “미워하였사오니”는 부정과거(aorist)로 과거 어느 시점인가부터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고 있으며, 지금도 미워하고 있으나, 그 미움은 이제 끝났다는 신학적 해석이 들어가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순서를 바꾸어서 다시 말하면, 지금 세상은 제자들을 가장 미워하여, 그 스승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려고 하는 이 순간, 사실 그 미움은 그것으로 이미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을 향한 세상의 미움은 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오는 권면과 위로와 힘은 지금도 계속되고 앞으로도 끝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세상의 평가나 인정이나 유명세에 따라 달라지는 기쁨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은 알려고 하지 않으며 이해하지도 못하고 멸시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끝없이 오는 그 은혜의 기쁨을 제자들을 위해서 간구하신 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도 변함없이,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전달되는 기쁨이며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죽음의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있는데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강력하게 북받쳐 오르는 기쁨이며, 그래서 사랑하는 남겨진 이들과 꼭 나누고 싶은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주님께서 간구하신 이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무엇인가 해야 하는 의무감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며 신앙생활의 장소는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지난 죄를 복기하느라 전전긍긍하는 그런 법정도 아니며 무서운 아버지 앞에서 체벌을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세상을 지으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기쁨을 느끼고 회복해야 합니다. 일단, 이 기쁨을 얻게 되면, 나머지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것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그런 기쁨입니다. 우리 모두의 신앙생활이 바로 예수님께서 죽음의 자리에서도 잃지 않았던 그 기쁨, 생과 사의 가장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잃지 않고,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그 기쁨,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꼭 전달하고 싶었던 이 기쁨을 체험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전하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기쁨을 간구하시면서도 또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제자들이 쉽게 빠질 수밖에 없는 시험을 알고 계셨기에 지극히 현실적인 시각과 감각을 반영하여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처럼 제자들도 함께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기에 세상에 남은 제자들에게 있을 일을 아시고, 그들이 직면할 일들을 진지하게 바라보신 것입니다. 16:33절에서 이미 제자들이 마주할 상황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예측하셨고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에 그렇게 환난의 한 가운데, 시험이 드는 상황에 놓이게 된 제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삶 자체를 한순간도 지속하기가 어렵고 위태롭고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이제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맞이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간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이 사랑하는 제자들을 제발 온전하게 보전하고 지켜달라는 기도는 너무도 진솔하고, 간절하고, 애절했을 것입니다.

 

이 미움과 환난은 14절에 나오는 것처럼, 주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세상의 상식이나 셈법의 범주를 넘어서는 영역에 속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제자들은 그분의 세계관을 공유하기에 미움과 환난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이지만 제자들의 삶은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세상에서 지속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확실한 말을 기대하는 세상 사람들이 답답해하면서, “도대체 너희들이 말하는 그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고 기다리는 세상은 지금의 이 세상이 아니기에, 세상의 말을 통해 설명하자면, 늘 우리의 말은 암시와 역설과 비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상식과 셈법으로 접근하는 방식에 마주해서는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 시험에 들어서 결국은 악한 일에 쉽게 휩싸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도록, 바로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을 간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모든 예측 가능한 사태나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확실한 대안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진리로 거룩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19절의 “진리로”라는 말은 “진리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즉 “진리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을 통해 드러난 진리 가운데”라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위하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거룩하다”는 말씀의 뜻을 맥락에서 살펴보면 언뜻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되신 것과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으로 보아, “거룩하게 되는 것은 순교를 위한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에서 순교는 가장 거룩한 행동으로 평가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반복해서 지금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리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여기 남아서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계속하도록 준비시키셔야 한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제자들의 거룩함을 간구하신 이유는 제자들의 앞으로의 사역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거룩하다는 의미는 “깨끗하다”는 의미를 넘어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10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너희가 깨끗하나”라고 말씀하셨고 15:3에서도 “너희가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라고 말씀을 하셨기에 오늘 본문 19절에서 제자들의 거룩을 위한 기도는 깨끗해진 단계를 넘어 “새로운 과업을 맡기신다”는 의미로 새로운 과업에 대한 준비를 부탁하신 기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통해, 제자들이 거룩하게 되어 자신이 하시던 일을 계속 수행할 것을 간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일은 예수님께서 먼저 복종과 죽음으로 그 길을 가셨기에, 제자들의 사역은 분명히 승리한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6:33에서 이미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당돌할 정도의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이제 앞에서 살핀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제자들이 마주할 세상에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은 세상은 알 수 없는 기쁨과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사역이지만, 그것은 세상의 상식과 셈법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상식의 범주에도 못 미치는 야망이나 욕심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이나 바라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은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어처구니없는 행동도 절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누군가 자신의 야망과 욕심을 투영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무신론자인 포이에르 바하가 냉소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말했던 욕망의 투영으로서의 종교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남고 말 것입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거룩하게 된 제자들도 예수님의 죽음과 순교의 자세를 가져야만, 주님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다는 묵직한 암시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가지 않으려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 들어서면, 우리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이해하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 기쁨을 누리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보전하시고, 결국은 진리안에서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분명히 듣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보다 성숙한 신앙인, 이른바 제자의 삶을 지향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궁극적으로 진리안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거룩함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늘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이해의 범주의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어디까지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자신의 것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도전을 줍니다. 본문 19절은 "truly sanctified"라는 영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거룩함은 바로 자신의 희생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에 연합으로 종교개혁주일을 기념할 것이기에, 따로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만, 바로 이 정신이 종교개혁의 정신입니다. 개혁의 칼에는 남의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것도 대상이 되어야 진정한 개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주님의 기쁨, 주님의 보호하심, 그리고 주님의 거룩하심에 함께 참여하는 언덕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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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박창훈 2020.10.27 11:25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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