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단상

  • 홈 >
  • 설교 >
  • 설교단상
설교단상
10월18일 예배 (박창훈 목사)설교 말씀 요약 박경옥 2020-10-18
  • 추천 0
  • 댓글 1
  • 조회 541

http://www.unduk.or.kr/bbs/bbsView/14/5810302

# “주기도문: 제자들을 위한 기도” (요한복음 17장 6절-11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기도를 하는 내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17장 1절부터 5절까지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기도,”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요한복음 17장은 크게 3개의 기도로 구성되어 있고, 오늘 본문은 두 번째 부분에 해당합니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6절부터 19절까지 연결되지만 오늘은 그 본문을 둘로 나누어서 6절부터 11절까지만을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13장부터 지속된 식사와 마지막 대화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자신의 죽음의 필연성, 불가피성을 말하고 계셨습니다. 적어도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잘못 들어온 제자 하나에 의해서 일이 꼬인 사건이거나, 자신이 죽음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하나님과 함께 계획한 사건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의 떠남,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으로 준비하라는 것이 주님의 당부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의 삶과 행동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었음을 밝히면서, 기도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특히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임은 *신적인 본질에 있어서 하나*임을 드러내신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기도야말로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이심을 드러내신 것처럼, 바로 그렇게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신성에서 일치하셨던 것과 같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신적인 본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목적에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개 기도를 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 그것도 세속적인 결과에 대해서 집착합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진행되거나, 내가 생각하는 대로 결과가 나오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될 때, 그것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본질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되신 분과 일치하려는 고백이고, 행동이며, 간절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는 처음에 아버지와 자신에 대한 기도였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제자들을 향한 기도로 향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 기도는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아쉬움과 기대와 바람의 표현입니다. 기도제목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그 기도제목은 지금은 아쉽지만, 앞으로를 기대하면서, 미래의 바람이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은 제자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아쉬움과 기대와 바람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7잘에 나오는 주기도문, 즉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예수님의 바람을 알 수 있습니다. 3년의 공생애를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셨지만, 이제 제자들에 대한 기도를 통해서, 제자란 모름지기 어떤 이유로 모였는지,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3년이라는 함께 하는 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바로 이 사실을 알리고 전하고 훈련시키셨던 것입니다.

 

첫째,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6절에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라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제자들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으로부터나 소중한 사람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경우 우리는 최대한 정성을 다해서 선물을 간수하고, 생명이 있는 선물인 경우는 최선을 다해 키우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선물로 받은 제자들을 아버지의 말씀을 통해 정성스럽게 키우신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6절에 “말씀”이 단수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수로 되어 있으니, 하나님의 뜻은 전체로 하나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 의지, 즉 사랑은 단일하고, 유일하고, 분명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6절에는 “말씀”이 단수로 되어 있지만, 8절에서는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라는 본문에서는 복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단일하고 유일하고 분명한 뜻은 예수님을 통해서 설교와 가르침과 예화와 실제적인 적용을 통해, 제자들에게 다양하게 제시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이곳과 저곳의 말씀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 같고, 언뜻 보면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 같고, 그래서 각각의 말씀이 더 깊이 고민을 하게 만들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 말씀이라는 전체적인 본질은 변하지 않고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말씀을 묵상하고, 때로는 고민하며, 더 깊이 말씀을 끌어안고 살고자, 그렇게 발버둥치는 모습에서,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동일한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양하게 제자들에게 제시되었으나, 그 모두는 하나로, 하나님의 뜻, 즉 하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바라보는 사물은 다양하겠지만, 그래서 때로는 다양한 말과 의견과 생각이 나올 수 있지만, 결국은 하나인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지키는 것이 되리라는 의지가 실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 시작되는 교회는 지금 당장은 아주 작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실제적으로 드러내려고 예수님에게 선물로 주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여 살리려는 사역은 예수님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제자들이 함께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주위에 모였던 제자들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역사 안에서 드러나도록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나에게 맡겨진 이들이 짐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벗어나고 싶기도 하고, 그들과 얽히지 않는 삶은 어떠할까라고, 가지도 않은 길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대로 훈련받지도 않아서 늘 실수투성이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도망을 가고, 그 가운데는 자신을 배신하는 제자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한 이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래서 이들을 통해 더 깊은 기쁨을 얻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온 줄을 알고 믿었습니다. 8절에서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온 것을 안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신적인 본질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전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꾸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 기적 가운데, 특히 7개의 표적을 엄선한 것이나, 그 표적 각각의 의미를 밝힌 것에서,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에서도, 상당히 초기부터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의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통해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사실은 군데군데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도 그 어떤 설득이나 권면이나 강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권위와 힘에 끌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는 주님의 말씀은 거역할 수 없는 정언명령처럼 다가왔습니다. 어떤 이유나 논리로 설득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 그 너머의 힘의 끌림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간의 평범한 앎과 인식 너머의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 없다면 제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인정이 우리 신앙의 기본이 되며, 더 나아가 우리가 제자라고 불릴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처음에서도 1: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제자들이 영접하는 자들이고 믿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의 상태를 보면, 제자들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직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앎은 계속 넓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옆에 있을 때에는 그 분에 대해서 여전히 잘 모르고, 시행착오도 하며, 그로 인해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앎이 더 넓어지고 있는 과정을 주님께서는 바라보고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도 아직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환상에서처럼, 처음에는 발목까지, 그리고 조금 더 있으면 무릎까지, 그리고 조금 더 있으면 허리, 그리고 헤엄칠 정도로 성장하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앎과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나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은 어쩌면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나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이 사실은 가장 나쁜 신앙상태입니다. 만약 “나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면 신앙생활의 큰 위기의 순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에 대한 앎과 그 믿음이 야말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점점 넓어지고, 아는 만큼 믿음은 더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제자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 가운데 앞부분에서 나온 것입니다. 6절에서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선물이며, 그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주기도문의 내용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6절과 11절에서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하신 일을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11절에서 특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 나오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은 이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주기도문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말은 이른바 신적수동태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일을 하셨고, 이제 제자들도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일에 나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도 이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거룩하게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13장부터 17장까지의 말씀으로 깨끗할 것을 당부하셨고, 13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겸손하라는 말씀 이전에 깨끗하게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3장에서 제자들의 모임은 아직은, 작은 공동체이지만, 가룟 유다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용인하심으로, 거룩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이셨습니다. 거룩함, 깨끗함은 문자적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는 분리되고 구별된다는 의미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과 다르다고 하여, 우리끼리 먼저 이해관계를 갖는다는 이너써클이 된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집단 이기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라는 말은 절대로 집단 이기주의의 구호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공동체는 세상 가운데, 세속적인 가치관을 초월한 가치관으로 인해,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먼저 나눔과 양보와 헌신을 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교회는 세상 사람들을 위한 모임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아픔과 부족함과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여기서 먼저 무엇을 할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면서, 그래서 우리의 작은 실천과 삶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탠리 하우어스의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resident alien)이라는 말처럼, 우리의 삶의 자세가 바로 그래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바란 것은, 11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그리고 예수님께서 떠난 이후로는 서로 함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같이 있어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에게 험난한 이 인생의 길을, 신앙의 이름으로 함께 같이 살아내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포용은 물리적인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작지만 세상을 안을 수 있습니다. 작지만 세상의 아픔을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언덕은 작은 모임이지만, 세상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작기 때문에 더 많이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1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자신의 떠남을 아시면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떠나면서 드리는 기도에, 남겨진 이들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과 당부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장 힘들 때, 제자들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작은 신앙공동체를 위한 주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그들이 아버지의 이름처럼 거룩하게 되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문제로 지쳐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고, 답답한 마음과 절망의 한숨이 있을 때, 바로 그 때가 주님의 모습을, 주님의 말씀을, 주님의 기도를 떠올릴 때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우리가 가장 답답할 때가, 바로 주위 사람을 끌어안을 때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가장 힘들 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제자들이야 말로 자신에게 선물로 주신 사람들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임을 알고 믿었던 이들입니다. 아울러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일에 함께 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언덕이 비록 작지만 살아있는 신앙공동체에서, 그리고 우리 각자가 주님의 제자로 세우심을 받도록, 알고 믿는 일에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 멈춤이 없이 나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이제 이렇게 다시 모인 이 시간부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일에 새로운 각오로 발을 내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추천

댓글 1

  • 박창훈 2020.10.20 12:01

    고맙습니다.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10월 25일 예배 (박창훈 목사)설교말씀 요약 [1] 박경옥 2020.10.25 0 527
다음글 10월 11일 예배 (김태완 목사)설교말씀 요약 [1] 박경옥 2020.10.12 0 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