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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 예배 (박창훈 목사)설교말씀 요약 박경옥 2021-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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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에 계신 그리스도” 

(요한복음 19장 17절~30절) 

 

오늘은 교회력으로 말하면 종려주일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으면서 들어가셨고, 오늘 이후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은 12장에서 이미 종려주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기에,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고난주간에 해당하는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모습은 공관복음에서 묘사하는 모습이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모습은 수난 또는 고난이라고 할 수 있는 묘사가 선명하게 나옵니다.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의 고통과 멸시받음과 비참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묘사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십자가는 예수님의 고난 자체보다는 예수님께서 사역을 완수하셨다는 것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17절은 다음과 같은 말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라고 담담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지신 십자가를 자신의 힘으로 직접 몸으로 지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십자가형이 집행되는 곳은 본문에서 해골 즉 골고다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18절에서 요한은 단지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가 십자가형이 집행된 내용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쓸개를 탄 포도주도, 저들을 용서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나 강도에게 낙원을 약속하는 주님의 음성도, 더욱이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 주님의 입에서 흘러나온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통렬한 외침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저 오히려 자신의 백성들에 의해서 버림받은 한 사람을 더 냉정할 정도로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은 그분의 고통 자체를 부각시키는 십자가 사건보다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려 한다고 보겠습니다. 그래서 본문이 주목하고 있는 세 장면을 추적하면서,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죄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19-22절까지 예수님께서 6시간이나 고통의 순간을 겪고 있는 순간에, 본문은 십자가 위의 죄패에 주목합니다. 공관복음에는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없고, 유대인의 왕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에서는 빌라도가 그렇게 직접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19:9에서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던 질문을 생각나게 합니다. “너는 어디로부터냐?” “너 어디 출신이지?”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벌인거지?” 이렇게 물었던 빌라도에게 그의 권한이 위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렸지만, 알아듣지 못한 빌라도는 여전히 나사렛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로마황제에게서 위임받은 빌라도 자신보다 더 높은 곳에서 오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를 포함하여, 이 죄 없는 한 사람을 사형으로 몬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니, 이 패를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레꼬-로만 사회를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유대인들의 히브리어, 로마인들의 라틴어, 그리고 헬레니즘 사회의 공용어인 그리스어인, 헬라어로 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전 세상이라고 알고 있었던, 지중해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죄패를 썼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몬 사람들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문구로 다툼을 벌였지만, 그 사이에 그들은 스스로 예수님을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알아보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본문은 그 사실을 놓치지 않고 지적하면서, 나사렛 예수가 유대인의 왕을 너머서, 실제적으로 세상의 구원자였다고,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이 스스로 고백하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원자로서 십자가를 지셨다는점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둘째, 십자가 아래의 군인들이 예수님의 속옷을 제비뽑아 가졌습니다. 십자가 위를 이야기하고서 본문은 십자가 밑의 군인들에게 시선을 옮깁니다. 이 장면은 시편 22:18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고난 받는 메시야를 묘사한 시편 22편의 말씀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입니다. 군인들이 '시편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의 옷(히마티온, 겉옷)은 네 깃으로 *나누고* 속옷(키톤)은 찢지 말자고 하여,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속옷을 찢지 않고 *제비뽑았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속옷은 예수님의 몸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물건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바로 교회를 상징합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그 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을 보호하는 옷이 나뉘지 않는 것같이, 어떠한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교회는 흩어지지 않고 보존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구약 열왕기상 11장에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폭정을 할 것을 엄포를 놓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을 찾아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여로보암에게 한 옷을 12조각을 내어 10조각을 줍니다. 그것은 이제 12지파 이스라엘 공동체는 나누어지고 흩어진다는 것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여로보암이 북쪽의 10지파를 데리고,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운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 옷의 조각은 나누어짐, 흩어짐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아래에 있던 군인들은 그들의 욕심으로 인해, 옷을 찢지 않고,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옷을 갖도록 했습니다. 그 위기의 순간에 시편의 예언의 말씀을 따라 주님의 몸에 상응하는 주님의 속옷을 나누지 않았으니, 고통의 순간, 그 어려움의 순간, 결코 교회는 나뉘거나 흩어지지 않을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며, 교회가 과연 지속가능한가에 대해서, 한국 교회가 지금처럼 진지하게 묻는 때는 없는 것입니다. 혹시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시각을 바꾸어야 할 때입니다.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전에 교회 이름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주님이 교회의 주인임에도, 어느 목사의 교회, 누가 담임인 교회, 누가 장로로 있는 교회로 불렀습니다. 교회성장, 교회지상주의라는 이름으로 교회는 사유화되기도 하여, 세습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만 좋으면 된다는 방식으로 공공성을 초월해 있는 것으로 행세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은 교회건물 안에서의 주인이었고, 세상의 주인이라는 점을, 상식을 기대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알리지도 못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수단이며,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이고,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한 도구입니다. 그러니 이 위기의 때가, 교회가 본질에서부터 시작할 절호의 때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발밑에서 군인들이 욕심으로 가득 찬 제비뽑기를 하는 동안에도, 자신의 몸, 즉 교회가 시련의 한복판에서 결코 흩어지지 않도록 지키신 주님이 교회의 주인이며 세상의 주이심을 증거해야 합니다 

 

셋째, 십자가 아래에 있는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통의 순간, 어머니와 제자를 번갈아 보시는 장면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시면서, 제자 요한을 아들로 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을 향해서는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시면서, 어머니처럼 모시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내용은 도망간 제자들은 알 길이 없는 내용입니다. 그 시간 그 십자가 밑에 있었던 요한만이 아는 개인적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멀리서 지켜봤을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요한은 십자가 바로 옆에 있었기에 주님의 마지막 뜻, 즉 유언을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효심을 읽을 수 있는 말씀으로 해석이 되었습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의미를 더 묻는다면, 요한이 시작하는 교회를 통해 일을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의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구약의 유대교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잊지 말라는 것은 유대교를 통해서, 구약의 하나님 신앙이 교회에 전달되었음을 잊지 말라는 부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그러니까 세상이 창조되던 순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은 이 십자가를 통해 실패하거나 폐기된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더 분명하고 더 강력하게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모든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교회를 통해 계속 전해지고, 퍼지고, 실현될 것을 간절히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본문은 주님의 모습에 주목합니다. 28절에서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라는 말씀으로 마지막 순간의 예수님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이 때는 이미 시간이 상당히 흘렀을 때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형은 극도의 고통을 느끼면서 숨을 거두도록 하는 극악한 형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고통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시편 69편에 나오는 고난의 메시야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말씀하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극강의 목마름을 통하여, 자신의 십자가에서 해야 할 일을 수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의 목마름은 단순히 육체적 목마름이 아니라, 영적으로 그리고 사역의 마지막을 알리신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특히 30절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을 위한 자신의 사역이 이제 대단원의 막을 내렸음을 분명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특히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는 본문은 능동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를 숙이셨고,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신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 예수님께서는 목마름의 선언과 다 이루었다는 선언을 통해, 우리가 십자가에서 보지 못했던 것을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유월절의 희생양으로 숨을 거두지만, 십자가에서의 자신의 죽음이 끝이나, 종말이나, 실패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사실은 자신이 하실 모든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하나도 소홀함 없이, 빠짐없이, 완벽하게 수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패배를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승리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예수님께서 하신 승리를 부활의 아침, 부활의 순간에 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부활의 아침이 승리의 지점이 아니라, 바로 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이 바로 승리의 지점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자로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Passion of Christ, 그리스도의 수난이나 고난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머리를 들고 숙이면서,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아버지께 맡기는 분명한 승리자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고민이며, 고통이고, 굴레인 죽음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면서 승리자로 선언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가장 역설적인 상황은 바로 십자가에서의 최후에, 힘들게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그 운명의 순간에, 그 분이 승리자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지금 가장 힘든 어둠과 절망과 심연의 길을 걷고 있는 분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위로의 말이나, 도움의 손길이나, 해결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바로 그 순간 그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절체절명의 순간이 주님과 함께 소중한 삶을 살아내는 출발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는 실패라고 말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승리의 순간으로 바꾸어놓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원자가 되시며, 시련의 때에 교회를 지키시고, 세상 첫 순간부터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신 분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갈지라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장 힘든 때, 가장 어두울 때, 가장 큰 시련의 때를 승리의 순간으로 바라보라고 권면하십니다. 바로 그 십자가가 승리의 순간임을 잊지 말고, 자신의 삶으로 담담히 나아가라고 초청하십니다. 이 한 주간 주님의 십자가를 진지하게 묵상하시면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영원한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시는 한 주간이 되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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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박창훈 2021.4.6 12:47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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