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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 예배 (김태완 목사)설교말씀 요약 박경옥 2021-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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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야 할 것'

누가복음 20장 41~47절 

 

우리가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호칭이 나옵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부른 자기 호칭, 그리고 다른 이들이 부른 예수님의 호칭입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자기를 부르는 호칭은 ‘인자’라는 말입니다. 이 인자는 다니엘서 7장 13~14절에 나오듯이 종말에 나타나 만민을 심판할 주권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부른 예수님의 호칭 중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 제자들과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불렀던 호칭으로 주님,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어린 양 등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알고 따랐지만, 그가 누군지 믿지 않았던 또는 그분이 오신 목적을 오해한 이들의 호칭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이와 같습니다. 

 

41절에서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십니다. 참 의아스럽습니다. 구약의 많은 본문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 이새의 뿌리, 다윗의 씨, 다윗의 의로운 한 가지로 올 것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기하 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의 씨를 영원히 남겨 주시고, 다윗의 자손이 영원토록 통치하시는 왕국을 만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복음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마태복음은 1장 1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선언하고 예수님의 족보를 서술합니다. 누가복음 1장 69절에서는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이런 질문을 던지신 걸까요?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사람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윗 자손 이상의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즉 메시아를 사람으로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이 상황을 벗어나게 해줄 다윗과 같은 그리스도,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누린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게 해줄 통치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쳤던 것은 예수님이 바로 다윗의 영광을 회복시킬 정치적인 메시야, 우리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군사적인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그런 메시야로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릇된 정체성을 바로 잡기 위해 시편을 인용하십니다.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이 시편 인용은 본문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2장 45절, 마가복음 12장 37절에서 동일하게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보는 시각을 경계하고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42절에서 ‘주’라는 표현이 두 번 등장하는데, 본문이 인용한 시편 110편을 보면 첫 번째 주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두 번째 ‘주’는 히브리어로 아도나이 즉 그리스도입니다. 다윗은 그 그리스도를 내 주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주님이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우편입니다. 즉 다윗이 고백한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던 이들에게 이미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했는데, 어떻게 다윗의 자손에서 나오는 사람을 주님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 아닌 것이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계시록 22장 6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말하십니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다” 다윗의 뿌리, 즉 다윗의 존재 근원인 동시에 다윗의 혈통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 1:3-4절에서 그리스도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렇게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론 예수님의 질문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범주에만 그리스도를 제한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아랫사람이 아니며,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왕으로써 메시아를 뛰어 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태초에 함께 계셨던 말씀이시며,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바로 잡으신 예수님은 서기관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서기관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판결을 내리십니다. 47절에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왜 이런 판결을 내리셨을까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을 거부하신 이유는 거기에 담겨 있는 권력과 욕망으로 인해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과 평행구절인 마가복음 12장 3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즉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치고 전한 이들이 율법에 정통한 서기관들이라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어려서부터 집중적으로 율법을 공부하고, 율법을 필사하거나 연구하여 가르치는 전문 율법학자로서 사람들은 그들을 존경하고 “선생님” 혹은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읽고 해석하는 자의 모습이 본문 46절과 47절에 나오는데,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들의 모습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것’, 바로 외식적은 모습이었습니다. 

 

외식은 “바깥쪽을 장식함”이란 뜻을 가졌는데, 사람은 겉을 보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결국 바깥쪽을 장식하는 사람은 사람의 평가를 하나님의 평가보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서기관들은 외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가보다는 사람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위선자였습니다. 46~47절을 보면 외식이 그들 삶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좋아하는 서기관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였습니다. 회당에서 상석은 두루마리 성경이 있는 상자 앞에 있는 자리로 일반 회중들과 마주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잔치에서 상석은 일반적으로 주인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말합니다.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기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4장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 말고 끝자리로 가야 함을 말씀하셨고, 본문에서도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힘쓰는 서기관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기관들의 악행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서기관들은 봉사에 대한 급여를 받지 않았기에 경건한 유대인들의 호의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서기관들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에 대한 관리를 맡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부 서기관들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다른 사람의 물질을 옳지 않은 방법으로 취하였습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그들에게 과부가 호의를 보일 때 그것을 악용하여 계속해서 물질을 요구하는 등, 엄청나게 챙겨 과부의 재산을 빼앗은 것입니다. 당시 “과부”는 사회 구조상 가장 밑바닥에 있는 구성원 중 하나였습니다. 남편이 없기 때문에 가진 재산이나 자기 자신도 지켜낼 힘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과부를 보호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신 24:19~21). 율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과부를 돌봐야 한다”고 가르쳤을 서기관들은 자신들은 과부를 돌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갈취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외식으로 길게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긴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을 특별히 거룩한 존재라고 믿게 하려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행동을 한 서기관들은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왜죠? 사람 앞에서 대단해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렇게 판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보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46절에서 “이런 서기관의 모습을 삼가라, 조심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나요? 바로 제자들입니다. 여기만 그런 경고를 하신 게 아닙니다. 누가복음 12장 1절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꿔 말하면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외식하고 싶은 유혹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하면 할수록 말씀을 읽고 공부하면 할수록 외식에 빠질 위험이 커진다는 것을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조심해야 할 것 두 가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아닌, 다윗의 자손으로만 부르는 것을 조심해라, 서기관의 외식하는 모습을 조심해라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 맘대로, 제 욕망대로 읽고 이해하는 것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 교회 개혁... 우리가 분명 추구해야 할 가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런 가치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이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는 것인지, 내 욕망에 따라 하는 것인지... 그래서 겉모습에 치중하는 지, 목적에 집착하는 지, 저는 그것을 내가 아는 것, 그래서 조심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분명하고, 우리 교회의 목적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교회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하기 위해서,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따라 행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 “제가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헌신했습니다”,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하는 말 대신 내 안 계시는 “성령의 인도대로, 오늘 내게 말씀해주시는 하나님 뜻대로 행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하길 원합니다. 그 성령 안에서, 말씀 안에서 능력이 나오는 것이지, 어떤 외부 슬로건, 목적, 겉모습만으로는 오히려 우리를 성령 밖으로, 말씀 밖으로 내몰아 버릴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하는 기쁨을 줄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 갈 것인데 외식이 아니라 진실로 인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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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박창훈 2021.3.8 12:28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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