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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예배 (김태완 목사)설교말씀 요약 박경옥 202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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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장 27~40절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

 

누가복음 20장의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의  권위에 대한 논쟁, 세금에 대한 논쟁에 이어, 마지막으로 나오는 부활에 대한 논쟁입니다. 부활 논쟁을 부추긴 집단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은 제사장 사독의 후손들로(아론의 아들 엘르아살까지 올라가는 족보) 유대인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을 때부터 예수님 시대에도 제사장 일을 독점 하면서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지도하는 중심 세력이 되었습니다. 또 유대인의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를 장악하는 권력을 가진 그들은 유대 전체 사회 구성원 가운데 극소수였지만 대단히 부유했습니다. 

 

이들은 구약성경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모세오경만 받아들였습니다. 부활을 부정했고 현세의 시간들을 풍족히 누리고 있는 그들은 현실만이 참이고 진리이며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사는 것을 지극히 어리석게 보았으며 현실과 차이를 보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했고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짓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부활에 대해 논쟁 이유는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어쩌면 부활에 대한 허구를 지적하고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신들의 신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던진 본문 28~33절의 질문은 ‘어느 한 여인이 형사취수제에 따라 일곱 형제의 부인으로 살다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면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믿고 있는 그 부활이 훗날 이루어졌을 때 과연 그 여자는 일곱 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입니까?’라는 것입니다.

 

이는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황당하고 어이없는 문제가 생기는데도 부활이 있다고 믿는 것이 합당하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당시 절대 권위의 대상인 모세 율법을 인용하였기에 섣불리 반박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형사취수혼 제도는 당시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여성을 배려하고 그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만든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 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두개인은 그 정신과 상관없이 자신의 옳음, 의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합니다. 믿음과 현실 속에서 현실을 따르기 위해 믿음을 버리는 사람은 모두 사두개인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이와 같은 현실이 있는데 그것을 믿는 것이 합당하냐? 즉 자신의 선택이 맞고,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참되고, 더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눈으로 읽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본문 속 사두개인들과 같이 도리어 성경을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시키고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시킵니다. 코로나 시대에도 물론 예배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교회는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배 공동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배 없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배보다 하나님께서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제사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다고 수없이 증언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미가서 6장 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실천하고, 인애와 자비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혹시 우리도 우리의 옳음, 우리의 의를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 없이, 하나님의 마음 없이 우리 손에 쥐어진 성경구절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우리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34~36절의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부활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십니다. 자신의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해서, 재산권을 얻기 위해서 일곱 형제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여인도 그곳에서는 더 이상 누군가의 아내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구나 생존권을 갖고 있고, 누구나 평안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권리를 가진 이들이 본문 36절에서 나온 거처럼 천사와 같고,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37절에서 예수님은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에게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며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기록하였음을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출애굽기 3장 6절은 떨기나무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만나셨을 때,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이 읽었던 성경은 70인 역(LXX)으로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이었는데, 여기서 출애굽기 3장 6절은 현재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었다”가 아니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즉 과거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었다”라고 소개하지 않으시고 현재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모세에게 자기를 소개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 현재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38절에 나옵니다. 바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살아있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곁을 떠난 이들도 역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인해 살아있는 것입니다. 38절에서 우리가 유심히 봐야 부분은 하반절,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는 부분입니다. 문자 그대로 보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으로 인해 살아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부활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 성서에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본문을 바라보면 부활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이뤄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합당하다’는 말은 ‘∽에 어울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부활에 참여하려면 천국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울리는(형용사) 사람이 하나님과 어울릴(동사) 수 있다. '누가' 하나님과 어울리는 사람이고, 하나님과 어울릴 수 있습니까? 바로 그분과 깊은 관계 맺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적인 차원이 아니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사람은 하나님과 어울리기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게 됩니다. 부활의 삶, 천국의 삶을 미리 이 땅에서 살게 됩니다. 그 삶이 고단하고 힘들어도 우리는 거기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말씀 위에서 똑바로 서는 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고, 절망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어 그분과 어울리는 사람,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비롯한 수많은 “살아있는 자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향한 부활의 여정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언덕이 되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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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박창훈 2021.2.8 11:34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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